생활성서사의 서평단 모집에 우연찮게 두번째로 당첨되었다.
하지만 제대로 쓸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욥기"는 어렵게 다가왔다.
하느님의,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욥'이라는 의인의 고통받는 이야기이기 때문인인듯도 하였다.
먼저 이 책을 읽기에 앞서, '욥'기를 먼저 읽는 것이 순서인듯 하여, 차근차근 읽어보기로 했다.
역시나 '욥기'는 나에게는 어려운, 아니 지루하기 그지없는 성경이었다.
'욥기의 희망 수업' 서평단 모집에 지원한 것도 이 기회를 삼아 '욥기'를 읽을 요량이기도 하였다.
'욥'은 하느님시대에 의롭고 올곧은, 한마디로 의인중에 의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욥'처럼 정직하고 하느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따른이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에서도 느끼듯 '욥기'를 통해서 우리들은 '희망'의 메세지를 전달받을 수 있어야 한다.
'욥'은 한마디로 고통받는 의인이었다.
지금 우리들은 펜데믹이라는 버거운 혼란속에서, 낯선 바이러스로 인하여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늘상 해오던 일들, 언제나 그곳에 가면 당연히 있어야 할 것, 반복된 일상들이 지금은 재제를 받기에 당연시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만나면 서스름없이 손도 잡고, 어깨동무도 하고, 안아도 주던 행동들에 거리감이 생겨버렸다.
이런때에 읽은 또 한 권의 책. '욥기의 희망수업'
정말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았다. 의인인 `욥`도 고통을 받는데, 하물며 평범한 우리라고 해서 고통을 피해갈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처럼 온갖 소소한 일상에 '거리두기'를 해야만 하고, 나와 타인을 위하여 '마스크를 착용'해야하는 불편함과 '손씻기','기침예'등 이런저런 지켜야 할 수칙들이 많아졌다.
문득 이럴때 우리가 잠시만이라도 동정성모님을 생각하며 '곰곰이'혼란속 생각들을 비운다면, 불편한 일상에서 자비를 배우게 되리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속에서 '욥'처럼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고, 기도하고, 청하는건 어떨까!
현실을 외면하지만 말고, 내가 이겨나가야 할, 내가 할 수 있다는 의지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청'하고 끈임없이 '기도'한다면, 지금 내게 놓인 일들은 손가락에 박힌 가시보다도 아픔과 고통를 적게 느낄 것이라 생각해보았다.
'욥기의 희망수업'을 읽으면서 저자의 배려깊음도 느꼈다.
바로 성서의 원문과 저자의 해석과 느낌들을 나열하여 이해를 도와준 점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본문들도 우리들의 삶을 비유하며, 머리에 속속 스며들도록 잘 풀이해 주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성경읽기의 난독증 초기인듯한 나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기 연습을 시켜주는 저자가 마치 마음씨 좋은 선생님과 같은 기분도 들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몇몇 부분들을 다시한번 옮겨 보았다.
-우리의 탐욕과 방황한 삶의 방식때문에 빈곤해지고, 파괴되고 있는 세상에 대해 더욱 책임을 갖게 될것이다. 놀라움은 '믿음의 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과의 친교에 들어간다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기도는 듣고 대화하는 것'이다.-
-'욥'은 언제나 기도의 힘을 청해왔다. '욥'이 원래대로 돌아가게 된것은, 하느님께 끊임없이 호소하며, 주님의 자비로운 현존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든사람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축복'의 표지이다.-
나름 이러한 결론을 내려 보았다. 어려움과 고통속에서도 희망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단지 우리들의 의지와 마음속 깊은곳에 있는 겸손과 자비와 사랑의 미덕을 가지고, 끊임없이 하느님과 대화하고, 청하라고 감히 얘기하고 싶다.
'기도는 듣고 대화하는 것'임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다.
그러면 우리들이 청한 '희망의 기도'는 '기쁨의 무지개'가 되어 다가올 것임에 분명할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