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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길을 하나 만들어야지요

    작성자

    kko3***

    등록일

    2025-01-15 18:01:16

    조회수

    27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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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말했다.
    "그럼, 길을 하나 만들어야지요."
    없는 길에 그가 자원해 길이 되었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 후 그 포연 가득한 혼란 속에서 태어나 자랐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이 찾는 카르카손 근처 작은 마을 레삭도드에서였다. 56가구, 280명이 살던 이 마을은 비옥한 땅에서 포도 재배로 넉넉하게 살았다. 그의 집은 마을 중심에 있던 성당 가까이 있었다. 성모 신심이 깊은 신자들 안에서 그 역시 자연스럽게 신앙을 배웠다. 그즈음부터 그 ‘소년’의 마음에는 갈망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제가 아직 프랑스에 있던 아주 어릴 때부터 조선 선교지에 관하여 들었습니다.
    그 가엾은 신입 교우들이 버려진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제게는 그들과 동행하고자 하는 커다란 갈망이 일었습니다."

    혁명으로 성당이 국가에 귀속되고 수도원이 문을 닫고 성직자와 수도자가 추방되거나 목숨을 잃은 프랑스에서 소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한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잔혹한 혁명이 초래한 수많은 위험을 모면한 그의 선량한 부모와 본당 주임신부 그리고 이웃과 친구들이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은 얼마나 용감하고 놀라웠던가!"

    소년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를 단련시켜 교회를 위해 스스로를 헌신하고 봉헌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키웠다. 드디어 소년은 카르카손 소신학교를 거쳐 대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1814년 스물한 살 나이에 차부제품을 받았다. 몇 해 후 사제가 된 그의 이상은 “하느님께서 다스리시고 승리하시도록 수난을 겪고 죽는 것”이었다. ​

    혁명 후 프랑스의 모든 교구에도 사제가 부족했다. 그런데 그는 또 다른 사도직의 소명을 느꼈다. 교구 사제로서 해야 할 일도 많았고 사랑하는 가족 가까이에서 영예롭게 살 수도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더 큰 열망이 불타올랐다. 그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파리에 있는 수도회에 간다는 건 부모님과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나선 길에 길고도 긴 편지 안에 부모님께 인사를 올렸다. 연로한 부모님이 얼마나 놀라고 아파하실지 너무나 잘 아는 아들이었다. 그는 부모님이 겪을 슬픔에 용서를 청하면서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신을 축복해주시기를 희망한다.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이생에서 잠시 헤어지겠지만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다시 만나도록 해 주시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

    ‘초대 조선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전기’ 이 출간됐다. 저자인 카미유 부르동클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후손으로 1938년 이 책을 출간할 때 오드 교구 페장 본당 주임 사제였다. 그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살다 간 흔적을 차근차근 들려주며 그가 얼마나 영웅적인 선교사였는지 알려주고 싶어 한다.

    약 210년 전의 일이다. 인터넷도 전화도 없었던 때, 유일한 소통의 방법은 편지뿐이었다. 오직 편지로만 서로의 생각과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후로도 아들로서 ..진심을 다해 부모님께 사랑을 전했다.

    그가 아시아로 떠나기로 했을 때 '주교님과 함께 거의 모든 분이 부모님을 생각하며 저의 결심을 돌리려 애썼다'고 한다. 그 역시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 길을 향했다. 그는 대신 부모님께 편지를 자주 쓰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 편지들이 남아서 흥미롭고 감동적인 체험과 이야기로 가득한 그의 아름다운 생애를 후손들이 알게 되었다.

    1826년 브뤼기에르는 동료 신부와 함께 '희망'이라는 배, 에스페랑스호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할 수 있는 한 편지를 보내 말로 다 못할 죄스러움을 어떻게든 대신하려고 했다. 그는 항해 중에 지나가는 배편으로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역풍이 불어 순풍을 기다리는 자바섬에서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는 자바섬의 이슬람 신자들에 대해서도 부모님께 알려드렸다. 또한 부적이 잔뜩 붙어 있는 중국의 집들에 대해서도 썼다. 그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총대표로부터 시암siam으로 가라는 명을 받았다. 지금의 태국 땅이었다. 그는 시암의 보좌주교가 되었다.
    1832년 페낭에서 브뤼기에르는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래 간직했던 갈망이 성취되었다. 하지만 눈앞에 기다린 것은 끝없는 고생길이었다. 무엇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는 길이었다. 심지어 도중에 들른 마닐라에서 그곳 주교는 "주교님의 계획은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염려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으로 오기 위해 중국으로 들어갔다. 선교사들에게 지옥과도 같았던 당시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수천 킬로미터....는 말로 다 못할 형극이었다. 마카오에서 복안으로, 다시 강서로, 강남을 지나 절강에서 강소로 이동하는 강행군으로 결국 브뤼기에르는 병을 얻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쉬지 않고 40시간을 걸어야 하는 때도 있었으니 병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산동을 지나 산서에 도착해서야 주교는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외국인 주교가 입국하면 상황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브뤼기에르는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산서에서 조선 입국이 준비되기를 학수고대하며 일 년을 기도로 보내야 했다.
    마침내 1834년 조선으로 향하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또다시 문제가 생겼다. 서만자에서 다시 6개월이 흘렀다. 1835년 브뤼기에르는 네댓 주 뒤에는 조선 국경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더없이 행복해하며 길을 떠났다. 또다시 고난의 여행이 시작됐다. 찌를 듯 높은 산을 넘고 숲과 드넓은 황야를 횡단했다. 영하 30도의 강추위에 강도와 맹수의 습격이 도사린 길이었다. ​

    브뤼기에르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자신도 쇠약한 상태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조선 교우들과 약속을 지키고자 힘을 다했다. 마가자라는 벽촌에서 잠시 멈춘 여정은 완전한 마침표를 찍었다. 그 저녁 브뤼기에르는 뇌출혈로 쓰러져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마흔셋의 나이에 평생 그토록 갈망하던 땅, 조선을 앞에 두고 이국에서 죽음을 맞은 것이다.

    1931년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침내 경성(서울)에 입성했다. 오랫동안 동몽골 펠리쿠 골짜기에 묻혀있던 그를 조선의 사제들이 모셔와 용산성당 성직자 묘역에 모셨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의 첫번째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지 백 주년이 되던 해였다.

    ..............................................​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시절의 이야기. 또한 그 역시 상상이 어려운 프랑스 사제의 깊고 강한 믿음. 이백 년 전 그들이 살던 세상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같은 것일까, 달라진 것일까. 많이 아득하다. 그런 세상이 있었구나...싶다. 그렇게 프랑스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 사이에 징검다리가 놓였다. ​

    그의 편지 덕분에 당시를 조금은 알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사제를 모욕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호의적으로 대한다. 프랑스와 달리 사제가 병자들에게 가까이 가는 데 어려움이 없다. (프랑스와 달리) 성직자의 방문이 병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가톨릭교회가 어떤 처지였는지도 조금은 알게 된다. ​

    너무나 힘든 시대의 너무나 힘든 개인의 여정이다보니 슬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갈망을 향해, 자신을 이끄시는 목소리에 전폭적으로 투신했으니 힘겨운 나날과 이루지 못한 꿈도 이제는 모두 보상을 받았을까?​

    조선천주교회 이야기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다. 이백 년 전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오늘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우리의 첫 주교님, 영원한 본향에서 우리를 위해 빌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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