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욱신부님은 작년 월간지 <생활성사>에 작은이야기라는 코너에 글을 연재하였다. 그 때 읽은 '너클볼'이란 글로 나는 허찬욱 도미니코 신부님 찐팬이 되었다. 그런데 2023년 해가 바뀌고는 집필진들이 바뀌게 되어 더이상 허찬욱신부님글을 읽을 수 없었다. T.T
그런데 이번 생활성서사에서 허찬욱 신부님이 쓰신 글을 모아 <원래 그런 슬픔은 없다>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책 표지 색깔이 주제를 말해주듯 슬픔에 관한 글이다. 타인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것, 힘든 것을 넘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이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을 이해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총 22편 어느 하나도 작은 이야기가 없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슬픔을 가진 사람에 대한 예의를 알게 하는 책이다.
1. 욥의 위로자들
자네들은 모두 쓸모없는 위로자들이구려. 그 공허한 말에는 끝도 없는가?(욥16,2~3)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과거 나는 분명 욥의 위로자였다. (욥의 위로자, 겉으로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려는 것처럼 보이나, 결과적으로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 뭔가 의미 있는 말, 따뜻한 말을 하면 그분의 슬픔에서 벗어나게 조그마한 도움을 줄 수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가졌다. 아니면 침묵의 상황이 힘들어 뭔가 애도의 표시를 해야 내 할 일을 다했다는 안도감을 얻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과거 나의 위로가 얼마나 그들에게 공허한 말이였을까 생각하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 내 입을 마구 쳐주고 싶다.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건, 특히 언어가 사라진 슬픔의 상황에서는 더 조심, 아주 조심해야 한다. 그 모호한 순간을 견뎌야 한다. 절대 그 분의 슬픔을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로지 그 불편한 채로 함께 조용히 견뎌주는 것이 슬픔을 함께하는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2. 당신은 모른다
상실의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다른 출구가 남아 있지 않을 때, 원망하고 저주할 대상이 하느님밖에는 남아 있지 않을 때, 하느님께라도 욕을 퍼부어야 숨이라도 쉴 수 있을 때, 그런 순간이 인간에게 오지 않으면 좋겠지만, 끝끝내 그런 순간이 오고야 말 때는 하느님 앞에서라도 서럽게 울어야 합니다. '왜 그러셨나고, 왜 나에게 그러셨나고'울면서 따져야 합니다.(99쪽)
그리스도인에게도 숨조차 쉴 수 없는 슬픔은 찾아올 수 있다. 그러면 더 절망스럽고 하느님을 원망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이에게 '하느님이 좋은 곳으로 부르셨다'는 종교적 위안은 결코 위로가 될 수 없다. 하느님께 원망이라도 해야 겨우 살 수 있는 사람에게 살길을 끊어 버리게 할 수도 있다. 하느님은 고통의 끝자락에서 부를 수 있는 마지막 이름이다. 우리가 그에게 별 거 아니지만 도움이 되고 싶다면 그저 손을 잡아주거나 가만히 등을 토닥여 줄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아니면 그의 슬픔을 먹먹한 마음으로 들어 주는 것이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3. 우리는 일어나 일하러 간다.
불후의 명작을 꿈꾸며 영감을 쫓는 이에게 영감은 오지 않습니다. 영감이란 사실 꾸준함의 다른 이름일뿐이지요. 필립 로스도 말하지 않던가요.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고요.(137~138쪽)
우리는 홈런같은 인생을 꿈꾼다. 슬프게도 그런 인생의 1%될까? 그 홈런도 알고 보면 수많은 타석에 나와 배트를 휘두르다 보니 삼진이 될 수도, 안타가 될 수도, 아주 아주 가끔 홈런을 칠 수 있는 것이다. 실패에 대해 연연해 하지 마라. 홈런타자가 가장 삼진아웃을 받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삶이란 야구처럼 그저 묵묵히 자기 타석에 나가 자기가 해야할 일을 충실하게 하면 된다. 운이 좋은면 안타도 치지만 운이 없으면 삼진아웃으로 물러날 수 도 있다. 그냥 꾸준히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하면 된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충실히 사는 삶. 그 하루 하루의 삶이 모여 우리의 인생이 된다고 믿는다. 힘주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묵묵히 하면 된다. Just do it!!!!
4. 내려놓으면 명료해지는 것
쳇 베이커는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어느 곡에서보다 자신만의 분위기를 더 진하게 자아냅니다.(203쪽)
과거를 생각하면 이해를 받고 싶다는 마음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공감을 받으려고 했을 지도 모른다. 그 마음 한곁에는 나도 내가 이해되지 못하여 이해받고 싶었던 마음이 컸나보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이 충족되었는지 이제 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잘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가 들으려고 노력하고 이해받고 싶다는 맘도 많이 줄었다.
나는 음잘못이기에 쳇 베이커가는 재즈가수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이른 나이 스타덤에 올랐으나 약물문제로 추락한 트럼펫 연주자. 이후 삶은 생계를 위한 밥벌이로 연주를 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후반부 연주 스타일은 단순한 연주를 더 단순하게, 최소한의 기교도 부리지 않았으나 명료해진 연주. 자신을 최소한으로 드러냄으로 완성되는 자신의 분위기. 우리의 삶도 버림과 내려놓음을 통해 우리 삶의 소중함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나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버림과 비움을 통해 내 안의 나만의 소중한 것을 지니고 있을 때 비로서 나만의 색깔이 드러난다고 한다. (제발 아름다운 색깔이길 바란다.)
책을 읽기 시작하여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읽으면서도 읽어야 할 글의 양이 줄어듦을 확인하며 슬펐다. 나에 대한 이해, 타인에 대한 이해 모두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모른다'이다. 모르기 때문에 조심히, 더 조심히 다가가야 한다. 작은 이야기의 힘 믿습니다. 덕분에 저의 얽혀있던 마음도 많이 풀렸습니다. 허찬욱 도미니코 신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