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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하느님이 선택한 이 초인超人에게 ‘그 홀로 서방의 모든 교회를 다스렸고 12세기를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졌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이다.

성 베르나르도와 시토회(트라피스트회)의 다른 많은 저자들은 코린토 1서 6장 17절을 즐겨 인용했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이 말은 “누가 주님을 포옹한다면” 그분과 한 정신이 된다는 의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서 그 팔을 십자나무에서 떼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베르나르도를 포옹했다는 전설은 베르나르도다운 신비 체험의 핵심을 정확하게 표현해 준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부르군디 디죵 근교 폰텐느 레디죵에서 일곱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난 베르나르도(1091-1153)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1111년 20세로 집을 떠났는데, 그의 다섯 형제와 두 삼촌, 30명의 친구들이 그를 따라 수도원에 들어갈 만큼 영향력이 큰 성인이었다. 성을 떠날 때 막내 니발도에게 “우리는 수도원에 들어가므로 이 성이나 영토, 아버지의 재산은 모두 네 것이야!”라고 말하자 “형들은 천국 재산의 상속자가 되는데, 난 다만 이 세상 재산의 상속자 밖에 못되니 생각할수록 분한 노릇이야.” 하고 답했다 한다. 1115년 랑그레에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12명의 수도자와 함께 파견되었다. 이때 그 수도원 이름을 바레답신트에서 클레르보(명랑한 골짜기, 빛의 골짜기)로 바꾸었고, 700여 명의 수도자가 생활하기까지 늘어났으며, 당시 68개 시토회의 모원母院이 되었다. 클레르보 성모 마리아 제단 앞에 묻힌 그는 시토회의 둘째 창설자로서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ifluus)로 불리며, 교황 비오 8세가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였으며, 제국의 왕들과 교황의 자문을 담당했고, 도움을 주기 위해 보낸 500여 통의 서한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내려온다. 유럽의 제2십자군에게 설교하여 대부대가 모였으나, 군인과 지도자들의 이상은 베르나르도의 이상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므로 십자군은 완전한 군사적 파멸과 윤리적 타락으로 끝났다. 십자군 타락에 대해 여러 면에서 책임과 고독을 느껴야했던 무거운 부담이 죽음을 재촉하여 1153년 8월 20일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베르나르도야, 너 무엇하러 여기 왔느냐(Ac quid venisti)?”

베르나르도 성인이 그의 온 생애에 자신을 재촉하며 했던 화두는 이것이었다. 세기를 짊어졌다고 평가되는 그의 화두가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도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문구이다.


[책속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부담스런 모든 것에 대해 나는 화가 난다” 라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카르투시오 수도회에 보내는 서간에 썼다. “내가 당신들을 위해서 봉사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신들을 잊어버려서가 아니고, 그것들의 잘못입니다. 그것들 때문에 나는 자주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자주 화가 납니다.”. 그는 거의 같은 내용의 서간을 브르타뉴Bretagne의 백작 부인 이르멘가르드에게도 보냈다: “당신을 방문할 수 없도록 나를 끊임없이 붙잡고 늘어지는 이런 모든 일 때문에 나는 화가 납니다. 믿어 주십시오.”.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는 “이 저주받아 마땅한 집무occupationes maledictae ‘하느님을 두려워함과 이웃에로의 개방을 마음에서 빼앗아 가는 일’”이라고 말했다.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서간에서 거듭 반복해서 자신이 얼마나 바쁜지, 얼마나 과중한 짐을 지고 있는지를 호소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답장 또한 짧게 쓸 수밖에 없음을 한탄했다. 친구 생 티에르의 윌리엄이, 자신이 보낸 그토록 많은 편지에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다고 베르나르도에게 불평하자, 그는 지극히 일반적인 구실을 내세워 변명한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가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우리는 자신들의 본분을 제쳐놓고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하라고, 다른 일에 몰두하라고 불려갑니다. 사방에서 닥쳐오는 이 공격! 실상 나는 내가 어떤 것 때문에 더 괴로워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불려 나가는 것이 더 괴로운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들로부터 찢김을 당하는 것이 더 괴로운 것인지. 아무튼 양쪽 모두에게 보다는 한쪽에서만 찢겨지는 것이 그래도 덜할 것 같습니다. 이 노예 신세! 이 속박!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내가 증오하는 것을 하고 있구나.”. 

또한 그는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 주오.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를 해설하면서, 자신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불평을 후회하고 취소하며 말한다: “여기에는 이 구절에 좀 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주었으면 하는 몇몇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 이들이 잘 듣는다면, 결코 아무 이유 없이 장상들을 귀찮게 하지는 않을 것이고, 나를 조금이나마 아끼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염치없이 또 경솔하게 나를 강요하진 않을 것입니다. 내가 잠시나마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때, 그 조용한 시간이 유감스럽게도 이런 손님들 때문에 나에게 허락되지 않음을 당신들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느 강론에서 자신의 마음이 황폐해진 포도밭 같다고 말한다: “괴롭다, 나의 포도밭은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해 있는지! 나는 그 둘레에 울타리를 만들어 두를 수도 없고, 그 안에 포도 틀을 만들 수도 없구나. 슬프다! 내 포도밭의 울타리는 파괴되어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가 내 포도를 빼앗아 가는구나. 나는 절망 속에 내팽개쳐져 있다. 분노와 조급함이 거침없이 내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쌓이고 닥치는 일들이 쫓기는 여우마냥 나를 파괴한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두려움, 앙심과 걱정들이 싸우려고 덤비고, 귀찮은 일로 찾아와 성가시게 하는 사람들, 이 모든 것에서 단 한 시간을 떠나 있을 수가 없구나. 그것들을 이 몸에서 떨쳐 버릴 수가 없구나. 거절할 힘도 없고, 잠시 기도할 시간조차 나에겐 없다.”


이런 표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인이며 신비가인 베르나르도의 인물을 묘사함에 있어서 방해 요소요, 부정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엔 그것들이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들이 우리 자신의 어려움과 약점에 위안이 되어 주어서라기보다는 탁월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도 삶의 조건과 인간적인 체험이 우리의 것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8-10페이지). 



들어가는 말 
베르나르도의 여러 가지 논문들과 아가 설교 텍스트들

A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길

99 가난한 인간으로서 너에게 베푸시는 하느님 사랑을 인식하라(아가 설교 36).
102 너 자신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너를 위대하게 만드신다
110 영적 투쟁에 있어 냉정한 시작과 하느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 (사순 시기를 위한 5번째 설교).
119 개요: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길은 사랑의 길이다.그 길은 모든 죄인에게 열려 있다(아가 설교 83).
129 인간이 회심하여 새출발할 때, 회심의 각 단계에서 무엇을 체험하는가?(회심에 관한 논문).
150 치유 과정으로서의 영적 여정(아가 설교 18).
153 하느님을 떠났을 때와 하느님께 되돌아왔을 때, 인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잃어 버린 아들의 비유를 들어 묘사한다(여러 가지 주제를 다룬 8번째 설교).
165 깨달음의 단계: 자기 자신을 알고, 이웃을 알며,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단계

B 그리스도의 가난과 약함 안에서의 하느님과의 만남

186 들음에서 오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그분의 외적 초라함(약함) 안에서 알아본다(아가 설교 28).
202 최상의 지혜와 철학: 예수님을 아는 것, 더욱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아는 것(아가 설교 43).
209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은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일깨운다(여러 가지 주제를 다룬 설교 22).
212 당신 사랑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그분 강생을 통해 얻으셨는가?(여러 가지 주제를 다룬 설교 29).
220 믿음 안에서 육화되신 분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 안에서 그분을 바라보는 것으로 변화되어 말씀과의 대화에로 이끈다 (아가 설교 45).

C 하느님 사랑의 단계들

230 완고함의 노예 상태에서 종과 품팔이꾼의 사랑의 단계를 넘어 아들의 사랑의 단계에로 접어드는 사랑의 자유에 이르는 길(서간 11).
242 하느님 안에서 엑스터시와 완성에 도달하기까지 사랑의 항구한 성장에 대해서(하느님 사랑에 관한 설교).

D 찾음과 발견의 시간들

280 말씀의 오고 감, 그 체험은 어떤 것인가?(아가 설교 74).
288 하느님을 사랑하고 찾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고 구함을 받았다(아가 설교 84).

E 하느님과의 만남과 일치

300 하느님과 만나는 세 장소(아가 설교 23).
310 모든 상상과 이미지의 피안으로 들어가는 황홀경(아가 설교 52).
316 사랑의 언어(아가 설교 67).
321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과 하나될 수 있는가?(아가 설교 71).
331 지식과 사랑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에 참여함(아가 설교 8).


344 옮긴이의 말
346 약자 해석
349 참고 문헌
354 베르나르도 성인의 생애와 약력


엮은이(편역) 베르나르딘 쉘렌베르거

엄률 시토회 수도자(독일 마리아 발트 남자 엄률 트라피스트 수도원 사제) 
부르군디 디죵 근교 폰텐느 레디죵에서 일곱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난 베르나르도(1091-1153)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1111년 20세로 집을 떠났는데, 그의 다섯 형제와 두 삼촌, 30명의 친구들이 그를 따라 수도원에 들어갔다. 성을 떠날 때 막내 니발도에게 “우리는 수도원에 들어가므로 이 성이나 영토, 아버지의 재산은 모두 네 것이야 !”라고 말하자 “형들은 천국 재산의 상속자가 되는데, 난 다만 이 세상 재산의 상속자 밖에 못되니 생각할수록 분한 노릇이야.” 하고 답했다 한다. 1115년 랑그레에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12명의 수도자와 함께 파견되었다. 이때 그 수도원 이름을 바레 답신트에서 클레르보(명랑한 골짜기, 빛의 골짜기)로 바꾸었고, 700여 명의 수도자가 생활하기까지 늘어났으며, 당시 68개 시토회의 모원母院이 되었다. 클레르보 성모 마리아 제단 앞에 묻힌 그는 시토회의 둘째 창설자로서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ifluus)로 불리며, 교황 비오 8세가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 아르마그의 성 말라키의 생애, 신애론, 아가서 주해, 성모 찬가 등 다양한 저술을 묵상에서 퍼올렸다. “베르나르도야, 너 무엇하러 여기 왔느냐(Ac quid venisti)?”라는 물음을 눈 앞에 두고 생활했던 그는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였으며, 제국의 왕들과 교황의 자문을 담당했고, 도움을 주기 위해 보낸 500여 통의 서한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내려온다. 유럽의 제2십자군에게 설교하여 대부대가 모였으나, 군인과 지도자들의 이상은 베르나르도의 이상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므로 십자군은 완전한 군사적 파멸과 윤리적 타락으로 끝났다. 십자군 타락에 대해 여러 면에서 책임과 고독을 느껴야했던 무거운 부담이 죽음을 재촉하여 1153년 8월 20일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옮긴이 장연옥 젬마 수녀

1967년-1984년 독일에서 체류

아오스딩회 수도자로 간호학 전공. 노이스 루카 시립병원에서 근무.

1984년부터 7년간, 일본 하코다테 천사원 여자 트라피스트 수도회원. 

현재 수정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수도승 생활을 하고 있다.


감수 이진수 스테파노 신부 

2001년 6월 마산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그라츠 칼 프란체스 대학교에서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대한 성서 신학을 주제로 석사 학위(2002년)를, 마카베오기 4서와 요한 묵시록에 대한 비교 논문으로 ‘신구약 중간사’ 분야 박사 학위(2004년)를 취득했다. 2006년부터 부산 가톨릭 대학교에서 교의 신학, 성서 신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2017년부터 마산교구 삼계 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면서 신학대학에 출강하였다. 지금은 옥봉 본당 주임신부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성서로 배우는 기초 신학”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나자렛 예수 2”, “베네딕토 16세의 기도”, “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가정에 관한 복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