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그가 이야기하는 ‘묵상’이라는 실천적 행위
마음의 균형을 잃기 쉬운 오늘날, 묵상은 현대인들의 마음을 가다듬고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묵상은 ‘성경 구절을 읽고 잠시 기도하는 개인적인 영성 시간’이 아니다. 신앙생활에서조차 묵상이 차지하는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요즘, 그리스도인의 묵상의 참된 의미를 《발타사르와 함께 말씀 안에 머물기》가 소개한다.
이 책은 ‘묵상’이라는 실천적 행위 안에서 응축된 발타사르의 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묵상의 참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발타사르는 묵상을 ‘삼위일체적이며 동시에 전적으로 인간적인 응답’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교 묵상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는 로고스, 곧 하느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과 행동은 하느님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그 자체가 하느님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이끄심에 기대어 그리스도의 침묵, 그리스도의 순종을 묵상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신비가 교회 안에 보존되고 계승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온전히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흘러가는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다.
다시 말해 발타사르가 말하는 그리스도교 묵상이란,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개인적이면서 공동체적인 응답이다. 전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마음 속에 새기고 성체성사를 통해 얻은 힘으로 세상에 응답하는 것은 묵상의 확장이며 기도의 완성이다. 묵상은 응답 없이 완성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찾기 위해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인간성에 등을 돌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일상의 행위 안에서 실천을 통해 충만해지고 그리스도의 신비는 더욱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책속에서]
따라서 그리스도교 묵상은 완전히 삼위일체적이며 동시에 전적으로 인간적이다. 아무도 하느님을 찾기 위해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인간성에 등을 돌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을 찾기 위해 모든 이는 성령 안에서 세상과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보아야 한다.
―10p, ‘머리말’ 중에서.
예수님의 주장은 종교사 전반에 걸쳐 유사한 경우가 없다. 그분은 어떠한 신성한 인간 상호 간의 사랑도, 질서 있는 자기 사랑도 다 제쳐 둔 채, 당신 자신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요구하신다(루카 14,26). 하느님께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인 그분을 통하지 않고 들어가는 자를 도둑이며 강도라고 책망하신다(요한 10,8 참조).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 그분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과의 어떤 관계도 주장할 수 없다.
― 17p, ‘중개하는 말씀’ 중에서.
묵상하는 이는 들으면서 인간 내면의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여는 믿음을 얻게 되고, 그러면서 기도를 지속한다. 듣는 이가 그 자체로 하느님께 돌려 드릴 수 있고 또 돌려 드려야 할 어떤 완성된 것을 건네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씀 안에 놓여 있는 개방성을 통해 그 자신의 개방성, 자유로워질 수 있는 은총이 그에게 선사되는 것이다. 이렇게 선사된 자유가 하느님의 성령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나중에 숙고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완전한 계약으로서 말씀이라는 그분의 존재에서부터 본질적으로 대화라는 사실이 분명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분이 자신의 존재로 전달하는 신인神人적 대화는 언제나 별개의 두 인간 사이의 단순한 대화 이상이라는 점도 함께 알아 두어야 한다.
― 26p, ‘중개하는 말씀’ 중에서.
양팔 저울로 달아 보면 한쪽에 올려진 우리 세속적 걱정과 편견은 언제나 위로 오르는 데 반해 다른 편에 올려진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의 존재는 언제나 내려간다. 이는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 존재가 “그지없이 더 큰 의미”(2코린 4,17 참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하느님께로 가는 통로를 만들 필요가 없다. “우리의 생명은” 언제나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콜로 3,3 참조).
― 30p, ‘묵상 소개’ 중에서.